martes, 29 de abril de 2008

Segovia, una ciudad con muchos detalles

2006년 8월 19일,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세고비아(Segovia)에 다녀왔다. 스페인어를 모르던 시절에는 세고비아하면 기타부터 떠올랐다. 그러다나 스페인어를 전공하게 되면서 세고비아는 자연스럽게 로마시절에 만들어진 수도교(El acueducuto romano)와 옛 카스티야 왕국의 궁전으로 백설공주 성(城)의 모델이 되었다는 알까사르(El alcázar medieval), 그리고 스페인 최고의 별미 중 하나인 새끼돼지 통구이 꼬치니요(El cochinillo asado)의 도시로 제자리(?)를 되찾게 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표도 이 세 가지를 경험하는 데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중심가까지는 멀리 않았다.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로마수도교였는데, 바로 앞에 관광안내소와 꼬치니요 요리로 유명한 깐디도(Candido)라는 식당이 있었다. 꼬치니요를 거기서 먹을까 싶기도 했는데 너무 유명한 게 좀 부담이 되어서 다른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꼬치니요의 요리방법도 여러 가지여서 식당마다 독특한 스타일의 요리를 제공한다고 한다. 수도교를 뒤로 하고 알까사르로 향했다. 다른 지역의 알까사르와 달리 정말로 어릴 적에 동화 속에서 보던 중세의 성이었다. 내부는 중세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성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따로 돈을 더 내야했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지불한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름다운 주변풍경을 보니 정말 오길 잘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또 하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 하나. 성 아래 쪽으로 뻗어 있는 길에서 성을 올려다 보는 모습도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서 찍어 온 사진을 보니 왜 나는 그때 그 생각을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많이 느껴졌다. 언제 또 갈 날이 있겠지. 그리고 다시 수도교 쪽으로 돌아오면서 그렇게 고대하고 고대하던 꼬치니요를 시식하였다. 참고로 꼬치니요 말고도 원래 부르고스(Burgos) 지방이 원조인 꼬르데로 아사도(El cordero asado), 즉 양고기 구이도 별미 중의 별미다. 밥을 먹으며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 우리가 미처 다 먹지 못한 고기 조각을 벌들이 날라와서 잘라가는 것이었다. 정말 신기하다 못해 경악을 했다. 벌이 고기를 먹다니. 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맛있는 식사. 이보다 더 좋은 여행은 없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경험 많이많이 해야지.'하는 바람으로 세고비아 여행을 마쳤다.

lunes, 28 de abril de 2008

Dos noches en Oporto

살라망까 여행을 마치고 2006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으로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오뽀르또(Oporto)로 떠났다. 포르투갈어로는 뽀르뚜(Porto)라고 하는데, "O"가 남성형 정관사라는 것 같다. 그냥 주변에 이곳을 다녀온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다들 괜찮았다고 해서 거의 충동적으로 떠났다. 항구도시여서 그런지 짠 내와 마드리드에서는 겪지 못한 습한 기운을 느껴졌다. 버스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역시나 동양인 관광객을 태운 택시답게 직선코스 대신 약간 시내를 도는 코스를 잡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기분이 나빠지기 보다는 처음부터 오뽀르또의 여러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와 지도와 여행정보를 얻기 위해 관광안내소로 향했다. 관광안내소에는 인상 좋게 생긴 아주머니 한 분 계셨다. 안내소의 한 켠에서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혼자 놀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아주머니의 딸이라고 한다. 아주머니는 내가 스페인어를 하는 것에 놀라면서도 대답은 꼭 영어로 해주셨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이후에도 이곳저곳에서 몇 번 더 겪을 수 있었다. 보통 오뽀르또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유명한 포트와인의 와이너리 탐방코스이다. 그러나 술을 별로 즐기기 않는 나로서는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2박 3일 동안 구시가지와 주변의 역사유적지, 그리고 가까운 대서양 해안을 돌아보았다. 구시가지는 이곳이 과연 관광지인가 싶을 정도로 정비나 청소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쓰레기와 오물들, 그리고 허물어질 것만 같은 건물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러한 모습이 다른 유럽의 관광지와는 차별화된 오뽀르또만의 매력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오뽀르또에 점차 빠져들게 된 것은 날이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하나 둘 씩 켜지면서부터였다. 친구의 말로는 오뽀르또의 야경은 프라하의 야경을 닮았다고 한다. 프라하를 아직 가보지 못한 나로서는 알 길이 없으나, 오뽀르또의 야경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둘째 날 찾은 대서양 해변은 우리나라 동해에 온 듯한 인상을 주었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차마 해수욕을 즐기지는 못하고 해변에 누워 따뜻한 포르투갈을 태양을 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일정을 좀 더 길게 잡아 와이너리 탐방코스도 다녀와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언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을지. 오뽀르또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치부까지 보여주는 리얼리티의 매력을 가진 도시라 할 수 있겠다.

Segunda excursión a Salamanca

2006년 8월 11일 1박2일의 일정으로 살라망까를 다시 한번 찾았다. 바로 7월에 왔었기 때문에 새롭게 볼 거리를 알아 보았다. 그래서 결정한 것은 농장체험이었다. 살라망까 주변에 있는 농장에서 말도 타보고 농장에서 직접 만든 포도주와 하몬 등으로 차려진 저녁식사를 먹는 관광상품이었다. 말타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정한 속도로 달리기가 왜 그리도 힘들던지. 하긴 말들도 초보 승마자 때문에 고생이 많았을 테지만. 사실 승마를 마치고 말들의 등에서 안장을 제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말들의 등과 배 쪽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있는 게 보였다. 피까지 흐르는 말들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안쓰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승마를 마치고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농장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양들과 그 양들을 지키는 개들이 보였다. 커다란 덩치에 개 세마리가 양무리 옆에 조용히 누워있는 모습이 한가로워 보였다. 우리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우리 쪽을 쳐다보더니 슬금슬금 걸어왔다. 약간 과장해서 거의 송아지만한 개들이 다가오니 순간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마치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사람들에게 머리를 들이미는 모습이 웃기고 귀엽기까지 하였다. 농장에서 일하시는 분이 오셔서 개의 등 위에 우리와 함께 있던 아이를 태워주셨다. 처음에 많이 무서워 하던 아이는 금방 신이 난 듯 엄마를 부르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이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사먹던 포도주나 하몬과는 정말 다른 맛이 느껴졌다. 니카과라에서 이민을 와 이곳에서 일한다는 아주머니는 연신 신기한 표정으로 우리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셨다. 포도주와 하몬 말고도 또르띠야 에스빠뇰라와 각종 초리소들도 우리의 미각을 호강시켜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살라망까 시내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농장의 주인아저씨가 자동차로 시내까지 데려다 주셨다. 불빛이 하나 없는 시골의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쏟아지듯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그토록 많은 별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농장에서 숙박을 하는 상품을 있다고 하니 나중에 다시 한번 찾아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omingo, 27 de abril de 2008

회상 - 紫霞淵

원래 자하(紫霞)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해가 질 무렵이면 서쪽 하늘로 자줏빛 노을이 곱게 수놓여 그렇게 불렸단다. 그래서 인문대학 1동, 2동, 농협건물, 그리고 대강당으로 둘려싸여 있는 이 연못은 자하연(紫霞淵)이라 불렸다. 사실 내가 입학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예쁘지는 않았다. 갓 데뷔한 신인여배우가 나날이 예뻐지는 것마냥 자하연 주변의 모습도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워졌다. 달리 말하면 경관 치장에 돈을 들일 만큼 서울대학교가 부유해졌다는 것이다. 학교경관을 가꾸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이왕이면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학업에 정진하는 게 나은 법이니 말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떠나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새삼 참 좋은 시절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 2005년 4월 22일, 날씨 아주 좋은 날 찍은 사진.

sábado, 26 de abril de 2008

Primera excursión a Salamanca

2006년 7월 8일. 스페인에 와서 첫 여행이다. 목적지는 살라망까(Salamanca)! 사실 한국에서부터 이곳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그 이유는 우선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유럽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그 어느 대학에도 뒤지지 않는 살라망까 대학교(Universidad de Salamanca)가 가지고 있는 오랜 전통 때문이었다. (이 대학교는 1218년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소 9세에 의해 세워졌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묘한 매력을 풍기는 살라망까라는 도시 그 자체였다. 또르메스 강(el río Tormes)을 끼고 자리를 잡고 있는 살라망까는 로마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쳐들어 왔을 때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셀띠베로 족(los celtíberos)의 한 분파인 박세오 족(los vacceos)이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운 요새도시들 중의 하나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살라망까가 주요 도시로 성장하게 된 것은 이곳으로 중요한 로마가도들 중의 하나인 "은의 길(la Vía de la Plata)"이 통과하면서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즉, 서기 1세기 경에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다리가 -반쪽은 17세기에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아직도 살라망까의 또르메스 강 위에 남아있다.) 그러나 모로인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해 온 이후 벌어진 기독교 왕국들과의 오랜 전쟁기간 동안 살라망까는 격전지로서 황폐해져 가기도 하였다. 그러다 레온 왕국에 의해 수복된 이후 제2의 발전기를 이루게 되는데 이때부터 오늘날 살라망까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하였다. (살라망까 대성당과 살라망까 대학교 등의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살라망까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은 "대광장(Plaza Mayor)"라고 생각한다. (살라망까 대광장은 피트 트레비스가 감독한 영화 "밴티지 포인트(Vantage Point, 2008)"의 무대-참혹한 폭탄테러현장-가 되기도 하였다.) 낮에도 사람들도 항상 북적이지만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올 무렵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대광장 바닥에 앉아 친구들과 맥주 혹은 음료수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평화롭기 그지 없다. 또 다른 하나의 매력은 바로 대성당 옥상에서 바라보는 살라망까의 모습이다. 그리고 해질녘 또르메스 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살라망까의 모습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멋진 장면이다. 또각또각 살라망까의 돌길을 다시 걷고 싶다...

Escuela Complutense de Verano 2006

2006년 6월 마지막 날, 드디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바야흐로 나의 '노마드'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시작이 좋지 않다. 한여름 스페인 메세따의 태양을 30년 동안 한국적(?)인 햇살에만 익숙해져 있던 내 피부가 이겨내질 못하고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가려움을 동반한 붉은 반점들! 마침 이곳에 연수 차 와 있던 동기와 후배와 도움으로 자리를 잡은 오스딸에서 미리 예약을 해놓은 UCM의 한 기숙사(Colegio mayor)로 짐을 옮긴 후 곧바로 병원을 찾았다. 이곳의 의료체계를 몰라서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는 대로 응급실을 찾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문진과 X-선 촬영과 혈액검사 등을 거친 후 담당의사가 내놓은 결론은 햇빛알레르기였다. 처방전을 써주며 약을 사먹고 가급적 태양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란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의 노마드 생활은 UCM에서 매년 개설하는 여름학교강좌로부터 출발하였다. UCM의 여름학교, 즉 ECV는 스페인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나라의 학생 및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4주 동안의 전문 강좌 프로그램을 말한다. 그 중에서 내가 들은 것은 "외국어로서의 스페인어 교육(Enseñanza del español como lengua extranjera)"이라는 스페인어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었다. 올해 이 강좌의 수강생은 약 50여 명. 그 중 절반이 스페인 학생들이고, 나머지는 다수의 중남미에서 온 학생들과 나를 비롯하여 미국, 독일, 체코 등 비스페인어 사용국가에서 온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직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현재 외국인 학생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사뭇 진지하고, 교수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나 역시 그런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수업에 임하였다. 아직 이곳 생활이 나설어서일까 선뜻 다른 학생들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4주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10여 명의 학생들과만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사귈 수 있는 참 좋은 기회였는데 그렇게 쉽지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게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다시 또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지. 다음 번에는 이런 후회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nómada

1. adj. Que va de un lugar a otro sin establecer una residencia fija. Apl. a pers., u. t. c. s.
2. adj. Propio de los nómadas. Cultura nómada.
3. adj. Que está en constante viaje o desplazamiento. Familia nómada. U. t. c. s. Este periodista es un nóm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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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mad
A nomad is a member of a group of people who travel from place to place rather than living in one place all the time. A country of nomads who raise cattle and camels.

인생은 항상 선택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잃는 것을 아쉬워 하기 보다는 얻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자세를 배워야 할 때다. 즐기자, 내게 주어진 삶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즐기자! '노마드'의 삶, 그리고 운명!